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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년 1세

(공민왕 17, 무신) 1 15일 고성이씨 이강(李岡)과 청주군부인 곽씨(郭氏) 3 1남으로  태어남. 이름은 원()이고 호는 용헌(容軒)이며 자는 차산(次山) 시호는 양헌(襄憲).

 

부친이 4 20일 밀직제학(密直堤學)으로 36세의 나이로 현직에서 사망했고, 시호는 문경(文敬).

 

조부 행촌 이암(杏村 李嵒)은 충정왕때 좌정승을, 공민왕때 수시중을 지낸 명재상(名宰相) 이며, 서예(書藝) 와 묵죽(墨竹)에 명성이 우뚝하고 ,<농상집요 (農桑輯要) > 를 원()에서가져와 춘천(春川)에서 5년 간 실험재배하고 보급한 위민의 실학자임. 외조부 곽연준(郭延俊)은 판개성부사를 지냈음.

 

양촌 권근(陽村權近)과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문하에서 사사받음. 어려서 부터 영특한 재질과 관후한 도량이 있었고, 개연(慨然)한 지절(志節)이 있어 범문정공(范文正公)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나중에 즐긴다."는 말을 사모하여, 언제나 자신도 그와 같이 하기를 기대하여 스스로 외고 읊조리며 공부하여, 부조(父祖)의 통서를 이루었음.(양촌집)

 

범문정공은 북송(北宋)의 명신 범중엄 (范仲淹)으로 저서에 범문정공집(范文正公集)이 있음.

1382년 15세

(우왕8, 임술)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함.

1385년 18세

(우왕11, 을축) 4월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함. 과거를 주관한 지공거는 서성군 염국보(廉國寶)와 정당문학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였는데, 시험관 포은 선생은 말하기를 "문경공(文敬公)의 재주와 덕성으로 그 베풀음을 다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그 아들이 이 같으니 참으로 하늘의 징험이 있구나" 하였음. (사가집 묘지명)

과거에 같이 급제한 자는 변계량 (卞季良), 이맹균(李孟畇) 33인 임.

1388년 21세

(우왕14, 무진)임금이 타는 수례와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승(司僕侍丞)이 됨.

1390년 23세

(공양왕2, 경오) 9월 사헌부 지평(持平)이 됨.

1392년 25세

(공양왕4, 이태조1, 임신) 4월 전라도 안렴사로, 정몽주 일파로 몰려 광주(光州)에 귀양온 은문(恩門) 도은 이숭인(李崇仁) 선생을 맞이함.

 

7 17일 정도전, 남은, 조준, 배극렴, 이근, 52명이 이성계 (李成桂)를 신왕으로 추대 조선왕조를 개창함.

정도전이 보낸 황거정에 의해 도은 이숭인이 금성(나주)에서 살해됨.

"곡 은문 도은선생"이란 애도시에서 "문장은 가을 하늘 별처럼 빛났고, 절의는 누가 공만한 자 있으랴, 금성(錦城)에서 옛날 말씀 도로 새기니, 흐르는 눈물이 옷과 수건을 적시네" 라고 은사의 비명횡사를 슬퍼하였음.

 

사헌부에서 문서를 만드는 정4품 시사(侍史)가 됨. 태조대왕께서 재주를 중히여겨 세번 불러 보고 발탁하였음. (사가집 묘지명)

 

십조소(十條疏)를 대사헌 민개(閔開)  연소로 올림.

1. 기강을 세우는 일

2. 상벌을 분명히 하는 일

3. 군자를 친히하고 소인을 멀리하는 일

4. () 하는 말을 받아 들이는 일

5. 거짓을 꾸며 남을 참소하는 말을 근절 하는 일

6. 안일과 욕망을 경계하는 일

7.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는 일

8. 환관(宦官)을 물리치는 일

9. 승니(僧尼)를 도태시키는 일

10. 궁궐을 엄하게 하는 일 등임.

 

임금이 말하기를, "환관, 승니를 물리치고 도태 시키는 일은 건국의 초기에 갑자기 시행할 수 없지만 나머지는 시행하겠다." 라고 했음.

 

9월 십일조소(十一條疏)를 대사헌 남재(南在)와 연소로 올림.  

1. 서북면 국경대비

2. 서북면 병기 확보

3. 부녀자 내왕 제한

4. 불교조심

5. 궁중 근검실행

6. 환관의 감언조심

7. 군자의 강론(講論)

8. 궁중 잡역인의 감축

9. 잡신의 제사 금지

10. 내탕금 출납제도 개선 

11. 지방군인의 징발 제한 등이었음.

1393년 26세

(태조2,  계유) 6 23일 죽림(竹林)에 유배됨 "세자빈 유씨(柳氏)를 사가로 돌아가게 한 내용을 밝혀야 한다." 는 상소를 올려, 임금의 노여움을 삼. 죽림은 경기도 죽산군 남이면 죽림리로, 현재의 안성시 일죽면 죽림리로 여겨짐.

1396년 29세

(태조5, 병자)5월 정무를 감찰하는 사헌부의 종3품 중승(中丞)이 됨.

1398년 31세

(태조7, 무인) 7월 조정 관원의 의복을 등급과 색상에 따라 구별할 것을 상소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음.

 

8월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남은,  이근, 방석,  방번등이 피살됨.

1400년 33세

(정종2, 경진) 2월 우부승지가 됨.

11월 좌부승지가 됨.

1401년 34세

(태종1, 신사)1 15일 좌승지가 됨. 익대좌명공신 4등에 록선되고, 60결과 노비 6명을 받음.

7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됨.

9 21일 대사헌에서  파직 됨.

법에서 금지한 야행(夜行)을 하다가 뒤를 따르는 순군(巡軍)을 구타하여 탄핵을 받음.

1402년 35세

(태종2,  임오)1월 경기좌우도 도관찰출척사가 됨.

4월 금주령을 계하여 시행 됨.

가을 식파정(息波亭)을 세움. 예성강 하구 벽란나루를 건너다니는 사람들의 근심걱정을 덜게하고, 사나운 물결을 잠재운다는 소망을 담아, 정자를 세워서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게 하였음.

1403년 36세

(태종3. 계미) 2월 임금의 친군을 통할하는 군관부(軍官府)인 승추부제학(承樞府制學)이 됨. 4월 고명부사(誥命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9월에 돌아옴. 명나라에서 태종의 즉위를 승인하는 고명(誥命)과 인장을 보내준 것에 대해 사례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때 고명정사는 우정승 성석린(成石璘)이었음. 중국에서 가져온 통감강목(通鑑綱目)과 십팔사략(十八史略)을 올림.

12월 평양부윤 겸병마도절제사가 됨.

1406년 39세

(태종6. 병술) 2월 의정부 참지의정부사가 됨.

6월 의금부(義禁府)의 으뜸인 판의용순금사사를 겸함.

8월 두번째 대사헌이 됨.

12월 판한성부가 됨.

1407년 40세

(태종7, 정해)1월 한성부사에서 파직됨. 전일 대사헌시, 간원(諫院)의 정청에 아전(衙前)이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이미 들어와 있던 아전을 이속(吏屬) 수십명을 보내어 힘으로 끌어낸 일로, 탄핵을 받음.

 

7월 왕명으로 민무질(閔無疾)의 죄를 질문함. 민무질이 아우 무구(無咎) 및 신극례(辛克禮)와 함께 종친간의 이간을 꾀한 사실이 알려져, 영의정 이화(李和義安大君)등이 민무질등의 죄를 청하였기 때문임.

1408년 41세

(태종8, 무자)2월 요동(遼東)에 가서  명나라에서 돌아 오는 세자 양녕을 맞이함.

4월 임금의 금강산 행에 같이 감.

5월 태상왕(태조)승하. 빈전도감판사가 됨

7월 경상도 순찰사(慶尙道 巡察使)로 나갔다가, 경상좌우도 도관찰사 겸령상주 목사가 됨.

1409년 42세

(태종9. 기축) 2월 경상도 도관찰사로 태조진용(太祖眞容)을 계림(鷄林 현, 경주)에서 서울로 모셔옴. 모사(模寫)하여 완산부(完山府, 현 전주)에 봉안키 위함이었음.

 

3월 태조의 영정을 받들고 계림으로 돌아감. 모셔오고 돌아갈 때 각사(各司)의 관원 1인 씩이 숭례문(崇禮門) 밖으로 나가서 맞이하고 지송(砥送) 하였음.

 

10월 강원도 동북면순찰사가 됨.

 

11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轅接使)에 추천됨. "서북면도순문사가 치보(馳報) 하기를, 중국 사신 해수(海壽)가 의주에 이르러, 이유 없이 성을 내며 목사 박구(朴矩)의 옷을 벗기고 판관을 결박하니, 행색(行色)이 급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의정에 이르기를 "만약 재상 중에서 위엄과 명망이 있는 사람을 원접사로 삼으면, 중국 사신이 독기를 부리지 "못할 것이다."하여 조정에서 이원(李原) 을 보내기로 추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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